1914-1987,
전남 목포
아명 이봉용李鳳用
조명암작사 ‘목포는 항구다’ 작곡, 2살 아래 여동생 이난영이 불러 대히트
문일선작사 손목인작곡 ‘목포의 눈물’을 이난영이 불러 인기 대폭팔,
이 두노래는 지금까지도 목포의 상징 노래로 불려져
조명암작사 낙화유수 작곡 1942년, 남인수가 불러 공전空前의 대히트
* 공전空前, 비교할 만한 것이 이전에는 없음.
어려운 가정 환경에서 성장, 보통학교 졸업후 음반상점 운영
여동생 이난영이 인기가수가 되어 당시 천재 작곡가 김해송과 결혼
매제인 김해송으로부터 작곡을 배움
1950년 6.25때 김해송 월북, 금지곡으로
그의 작곡 고운봉노래 선창, 백년설노래 고향설등은
다른 작곡가 이름을 빌어 명맥 유지
후 이난영·김해송부부의 딸들이 ‘김시스터즈’ 음악그룹 활동,
후 이봉룡의 딸도 이에 합류
음반기업을 운영하다 1960년 딸의 초청으로 미 이민
1986년 입국 서울서 생활하던중 1987년 서거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에 포함
노래 남인수南仁樹
1918~1962
경남 진주
본명이 최창수崔昌洙였으나
개가한 어머니를 따라 진주강씨 문중에 들어가면서 강문수姜文秀로
‘남인수’는 가수 데뷔시 작사가 강사랑이 지어준 예명
손목인이 ‘목포의 눈물’과 ‘타향살이’를 작곡한 이듬해인 1936년
시에론레코드에서 취입한 ‘눈물의 해협’으로 데뷔
1938년 「애수의 소야곡」으로 일약 스타덤에
타고난 미성美聲의 그는 시대감각에 맞는 1,000여곡의 노래를 불러
조국 광복의 환희는 「감격시대」로
국토 분단의 아픔은 「가거라 삼팔선」으로
6·25 피란민의 애절한 절규는 「이별의 부산정거장」으로
1세기에 하나 날까 말까하는 가수황제로 추앙칭송,
한국가수협회장 역임